[꿈자람책놀이터] 도서관 검색기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?(긴글)
- 하는 일/실천 이야기
- 2019. 5. 17. 11:06
(글쓴이:정한별사회복지사)
도서관 검색기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?
Ⅰ
소설가 박완서는 소설 초고에 대부분의 시간을 쓰는 작가입니다.
원고지 고작 10장을 쓰기 위해서는 50장, 100장의 파지가 나온다고 합니다.
어린 시절, 휴지 대신 ‘뽕나무 잎’으로 뒤를 닦던 작가는 종이가 아까워 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.
컴퓨터의 ‘문서작성 기능’은 작가의 이러한 불편함을 일시에 덜어주었습니다.
파지 한 장 안 내고 마냥 뜯어고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하다 하였습니다.
컴퓨터가 고장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.
어느 날 오랜 기간 사용한 컴퓨터가 망령이 들었습니다. A4용지 서른 장이나 되는 원고를 감쪽같이 집어 삼켰습니다. 아무리 유능한 기술자를 불러도 꿀꺽한 원고를 살리지 못하는 컴퓨터를 원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.
수작업을 할 때가 그립기도 했지만 나는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. …… 이 나이에 왜 한 자루의 펜 대신 이런 거창한 기계는 써가지고 종당엔 이런 모욕까지 당해야 하는지, 생각할수록 분했다.
- '나의 웬수덩어리' 중에서
더욱 편리하고, 효율적이고, 깔끔해졌지만 수작업이 그리운 것을 왜일까요?
그 좋은 순기능에 제동이 걸렸을 때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전문가에게 의존하기 때문일 겁니다. 그 전문가라는 것이 대단하지도 않지만 의지하지 않으면 단 한글자도 더 써나갈 수 없는 그 통제 밖의 영향에 무력하기 때문입니다.
Ⅱ
서울 신촌 일대의 헌책방을 돌아다녀본 적이 있습니다.
일단 좁은 문을 밀고 들어가면 더 좁은 복도와 빽빽한 서가가 눈에 들어옵니다.
책방 주인의 체계에 따라 책들은 나름대로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.
옷깃 날리며 몇 번만 쓰윽 훑어보아도 어디에 한국 소설이 있는지, 사회운동책이 있는지, 요리책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.
저는 보통 마음에 드는 곳에 멈춰 서서 한 권씩 책 이름만 보고 뽑아 읽습니다. 꼭 찾고 싶었던 책이 있다면 좀 더 반가운 마음으로 꺼내 쟁여두기도 합니다. 그렇게 작은 서가를 몇 번 뒤지면 마음에 드는 책 한 두 권은 나오기 마련입니다.
늘 그렇게 책을 찾아왔습니다.
요즘들어 생긴 알라딘 중고서점에는 검색이 있어 원하는 책을 금방 찾을 수 있어 편리하긴 합니다만, 헌책방에서 늘 그렇게 눈으로 책장을 뒤지며 책을 찾아도 보물 같은 몇 권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.
Ⅲ
동네 작은 도서관인 꿈자람 책 놀이터에서도 책을 검색하여 찾을 수 있습니다.
도서분류법에 따라 도서가 분류되어 있고,
청구기호에 따라 아주 세세하게 꽂혀 있습니다.
책 이름만 대면 검색을 할 수 있고, 인터넷으로 예약을 할 수도 있습니다.
우리 도서관에 없는 책은 다른 도서관에 신청하여 받아볼 수도 있습니다.
조그마한 도서관이지만 참 편리합니다.
웬만한 서점에 있는 책들은 구해서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.
원하는 책을 5분 내로 찾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.
장서를 점검하면서는 더욱 편리하고, 효율적이고, 깔끔해졌습니다.
그렇지만 마음 한켠이 여전히 허전한 것은 왜일까요?
편리한 만큼 어려워졌기 때문일 겁니다.
어려워진 만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. 정교한 분류 체계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만이 책장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. 1년 넘게 당직을 섰던 직원들도 대출 반납 시스템을 처리하면서 자꾸 실수합니다.
일자리 사업에 참여하시는 어르신들께는 넘지 못할 산 같은 존재입니다.
책이 있고, 사람이 있는데 시스템에서 길을 잃어 책을 건네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합니다. 늘 주변 정리를 잘 하시는 깔끔한 성격의 어르신이지만 책장 정리하는 방법이 어려워 가만히 둘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.
공간을 쓸고 닦고 정리하는 일에 능하신 어르신들이 시스템 앞에서는 걸음마단계가 됩니다. 다른 도서관 책을 인터넷 상에서 어떻게 대출할 수 있냐는 전화문의에 주눅이 듭니다. 무력해지고 어려워집니다. 책을 정리하는 일은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, 사서나 자원봉사자가 전담할 일입니다.
도서관에 검색 기능이 없다면 어땠을까요?
내 집이 아닌 공공 도서관이기 때문에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기본임을 압니다.
십진분류표라는 공식 체계와 대출반납 및 회원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수라는 것도 압니다.
그럼에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.
누구나 어질러져 있는 책장을 쉽게 정리할 수 있었으면.
누구나 수기로도 대출과 반납을 할 수 있었으면.
그래서 정리 좋아하시는 어르신들이 주눅들지 않고 실컷 일하실 수 있었으면.
도서관에서 하는 일이, 영리한 몇 명의 전문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면.
헌책방에서처럼 큰 분류 속에서도 보물같은 책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.
하지만 소설가 박완서가 말하였듯, 이제는 돌아갈 수는 없는 시절임을 이해합니다.
우리는 더 열심히 책을 정리하고 시스템을 익힐 것입니다.
다만, 높은 장벽을 오르기 전에 ‘과연 우리가 올라갈 수 있을까’ 짧게 한숨을 미리 쉬어 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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